[책마을] 배가 침몰하자 떠오른 인간의 본성

입력 2023-05-12 18:06   수정 2023-05-13 00:28

1741년 5월 남아메리카 최남단의 한 무인도. 250여 명의 선원을 태운 영국 군함 ‘웨이저 호’가 난파했다. 조난된 선원들은 선장의 지시 아래 해군의 규율을 따랐다. 처음에는 그랬다. 머지않아 악천후와 질병, 굶주림 등 절망적인 운명을 마주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인간의 잔혹한 본성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살인과 식인, 그리고 선상 반란이 발생했다. 선장은 배를 잃은 책임을 질 걱정에 브라질을 경유해서 탈출하자는 선원들의 주장을 무시했다. 그는 어떻게든 본대에 다시 합류해야 한다고 우겼다. 결국 생존자 대다수는 선장과 그를 지지한 일부 선원을 버려둔 채 출발했다. 이들은 5000㎞가 넘는 항해 끝에 브라질에서 구조됐다. 출발한 81명 중 생존자는 29명이었다.

생존자들이 고향 땅을 밟고 얼마 가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죽은 줄 알았던 선장 일행이 귀환한 것. 영웅 대접을 받던 생존자들은 순식간에 ‘반란자 무리’가 됐다. 반란자 무리와 선장 무리는 무인도에서 벌어진 일들을 각자 자기한테 유리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잘잘못을 가리기 위한 군법회의에서도 이들의 증언은 엇갈렸다.

내러티브 논픽션의 대가 데이비드 그랜은 신간 <웨이저 호>에서 실제 발생한 조난 사건의 전모를 파헤친다. 선상 일지, 편지, 일기부터 법정 증언과 해군 보고서까지 풍부한 자료를 조사해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책은 ‘스토리텔링’이 어떻게 개인의 운명은 물론 집단적 기억마저 좌우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책은 무자비한 바다가 선사한 절망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굶주림에 지친 생존자들은 추첨을 통해 동료 한 명을 살해하고 식인할 것마저 고려했다.

선원들의 처절한 생존기는 법정에서 서로 책임을 돌리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반란자 무리는 선장이 항변의 기회 없이 선원을 쏴 죽이는 모습을 보여 더는 따를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누구의 손을 들어주든, 재판은 대영제국의 선봉에 섰던 선원들이 어떻게 무정부 상태와 야만성에 빠졌는지 폭로했다”고 말한다.

“선원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이야기를 조작한 것처럼,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해상 패권을 두고 스페인과 경쟁하던 영국 입장에서 해군의 부끄러운 민낯은 밝혀져선 안 될 문제였다. 당초 웨이저 호의 출항 목적도 스페인 갤리온선을 노략질하기 위해서였다. 당국은 선원들의 명백한 반란 행위와 반인륜적인 참사에도 공식적인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웨이저 호의 사례는 법정 너머까지 반향을 일으켰다. 인간 본성을 연구한 볼테르와 루소 등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생존자들이 “홉스적 자연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받았다. <모비 딕>을 쓴 허먼 멜빌과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 등 후대 작가들이 작품을 구상하는 데 영감을 주기도 했다.

정리=안시욱 기자

이 글은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실린 줄리아 실러의 서평(2023년 4월 1일) ‘The Wager Review: Shipwrecked and Worse’를 번역·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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